2020년 63차 장흥 가지산
태풍전야의 어수선한 분위기속 산행
오늘의 야생화 며느리밥풀 참취 큰고들빼기
산행기록
○ 일시 : 2020.9.6 09:12 ~ 13:230
○ 장소 : 장흥 가지산
○ 참석 : 3인(떠날꺼야,잎새공주,산중애)
○ 높이 : 가지산 510m / 누적고도 395m
○ 거리 : 4.0km
○ 시간 : 4.1시간(휴식시간 1.5시간) / 이동시간 2시간
○ 배지 : 가지산
○ 코스 : 보림사주차장 - 부도탑 - 전망대 - 망원석 - 가지산 - 소나무숲 - 비자나무숲 - 보림사
○ 특이사항 : 태풍전야의 어수선한 분위기
<가지산>
높이 510m이다. 산세가 좋고 돌을 깎아 세운 듯한 정상에 큰 바위 4개가 높이 솟아 있다. 꼭대기에 큰 니바우(바위 넷)가 높이 솟아 있어 니바우산이라고 부른다.
달마(達磨)의 선법(禪法)을 처음 전한 통일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보림사(寶林寺)가 있다. 보림사는 9산문(九山門:선법의 절을 뜻함)의 하나이다. 고려 말기 9산문이 모두 그 기운을 다하여 퇴락하였는데, 이 산문의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왕사(王師)로 1356년(공민왕 5)에 구산문을 통합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그 후 문풍(門風)을 전하였다고 한다. 사찰 내에는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남쪽으로 탐진강을 막아 장흥댐이 건설되어 있다.
[출처]가지산 [迦智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가지산 정상

가지산 산행개념도

가지산 비자림 산림안내도

보림사 부도탑앞 주차장(공터)에서 시작합니다

김삿갓의 시비 과보림사 김삿갓리이다녀간 기록이네요. 그리고 함평 용천사에도..
김삿갓이 보림사를 지나며 쓴 시비

다들 일생의 사연들을 간직한 부도탑

며느리밥풀 억울하게 죽은 며느리의 하소연이 들리는듯
<며느리밥풀 전설>
옛날에 마음씨 곱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와 성질이 못된 시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늘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시어머니는 호시탐탐 내쫓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가 밥이 잘 되었는지 보려고 밥알을 입에 넣자, 시어머니는 이를 핑계 삼아 어른보다 먼저 밥을 먹었다며 며느리를 때려죽인다. 이후 며느리의 무덤가에 붉은 입술에 밥풀 두 알을 입에 문 듯한 모양의 꽃이 피어나는데, 사람들이 이 꽃을 보며 ‘며느리밥풀꽃’이라고 불렀다.

의외로 약수터가 많네요. 요즘은 식용하기가 좀 그렇지만서도

전망대에서 보는 보림사 모습
<가지산자락에 전해오는 전설>
보림사터는 원래 못이었는데, 신라의 명승 지눌이 절을 짓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이 곳 가지산에 도달해 보니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터였으나 불행히도 못이었다.
지눌은 이곳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뒤 그 치료방법으로 누구든지 눈에 병이 있는 사람은 장흥 가지산의 못에 돌 한덩이와 숯 한덩이를 던져 넣으면 눈병이 낫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렇게 해서 못이 메워지자 이 안에 살고 있던 뱀·이무기들이 모두 나갔다. 그러나 청룡과 황룡만은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으므로 지눌이 지팡이로 쳐서 쫓아냈다. 못에서 쫓겨난 두 용은 현재의 용소에 이르러 서로 승천싸움을 벌이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도막나면서 패어 용소가 생겨났다.
결국 백룡은 승천했으나 청룡은 피를 흘리며 돌아다니다가 죽고 말았는데, 이때 넘은 고개가 현재의 피재이고 죽은 자리가 장평면 청룡리라 한다. 그리고 용소가 위치한 마을 이름도 용문동이라 하며, 늑룡(勒龍)이라는 마을이 그 이웃에 있고, 부산면과 장평면의 경계에는 용두봉이 있다.

마치 망원경과 같이 생긴 바위 망원석입니다 수인산 사자산 억불산들이 보인다는 조망처
유치호에 수몰되어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이 선돌에 올라와 고향땅을 내려다보며 시름겨워하기도 했다고 해서 ‘망향석’이라 하고, 망원경처럼 생겨 ‘망원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 근처에 은거하고 있던 스님들이 이 바위에 앉아서 산천을 조망하며 수도하기도 했다는 전하는 곳이다.
오른쪽 아래 쪽으로 탐진강과 산줄기가 용틀임을 하듯, 산태극 물태극의 조화를 이루는 풍광

망원석 설명판

아기바위가 탄생하는 모습입니다
진통이 시작된듯 합니다

오봉산 칼바위 느낌이

정상부

근 5년만에 다시찾은 가지산. 많은 기억이 있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새로운 부분이 많다

어인 벼랑바위

암릉길

정상부의 거대암봉

호남정맥은 이렇게 흐르고

가야할 곳도 암릉의 바위산들

소나무 산림욕장

소나무산림욕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휴양처

보림사주변 비자나무숲도 근사하게
1982년도 산림자원보호림으로 지정받은 보림사 비자림은 2009년 산림청, (사)생명의숲국민운동본부, 유한킴벌리가 주관하는 제10회 전국아름다운 숲으로 선정 되었다
보림사 천연비자림은 150~300년생의 비자나무 600여본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보림사 비자림은 물푸레와 노각나무가 상층림을 이루고 있고, 하층식생으로는 장흥의 전통차 ‘청태전’ 원료인 녹차와 비자나무가 숲을 형성하고 있어 생태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비자림에는 테르펜이란 물질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피톤치드 같이 방향, 살균, 살충 효과가 뛰어나고 숲을 걸으면 자율신경을 자극해 신경안정과 뇌건강에 좋은 역할을 해 심신의 피로가 풀리고 활기를 되찾을 수 있다.

표고의 고장답게 곳곳에 버섯재배지가...

익모초도 고개를 내밀고 우릴 반겨주고

새단장하는 보림사의 모습
<보림사>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체징이 창건한 사찰.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은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였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이다.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출처] 보림사 [寶林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림사는 국가유산의 보고
국가지정 국가유산
01. 국보 제44 호 - 보림사 남, 북 삼층석탑 및 석등
02. 국보 제117 호 -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03. 보물 제155 호 - 보림사 동 승탑
04. 보물 제156 호 - 보림사 서 승탑 2기
05. 보물 제157 호 - 보림사 보조선사 탑
06. 보물 제158 호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07. 보물 제745-9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월인석보 권제 25
08. 보물 제772-3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금강경삼가해 권제1
09. 보물 제1252 호 - 보림사 사천왕상복장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제9,권제10
10. 보물 제1254 호 -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4상

중요문화재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63년 국보 제44호로 지정된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 동 승탑, 보림사 서 승탑, 보림사 보조선사탑,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남쪽 석탑이 높이 5.4m, 북쪽 석탑이 5.9m이며, 석등은 높이 3m로서 이들은 모두 870년(경문왕 10)에 건립되었다. 비로자나불좌상은 858년(헌안왕 2)에 김언경(金彦卿)이 자신의 봉급을 모아 조성한 불상이다.
[출처] 보림사 [寶林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117호)
비로자나불은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의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불상이다.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며 법신불이라고 한다.
왼쪽 팔 뒤에 조상기(造像記)가 음각되어 있는데 "대중 12년 무주장사 부관 김수종(武州長沙副官金遂宗)이 왕에게 불상 만들기를 청했다"는 내용이다. 보조선사창성탑비문에도 이 불상의 조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선제 14년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로서 시철(市鐵) 2,500근을 내어 노자나불을 조성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두 기록으로 보아 김수종과 김언경은 같은 인물이며, 지권인(智拳印)의 철불 존명(尊名)이 노자나불임을 알 수 있어 신라 하대 신앙사연구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불상이다.
이 상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에 비해 인체의 비례가 맞지 않는데 몸에 비해 머리는 큰 편이고, 지권인을 결하고 있는 손은 지나치게 작은 반면에 발은 지나치게 크게 조각되어 있다. 얼굴은 경직된 인상으로 약간 치켜올라간 긴 눈과 각이 진 코, 두툼한 입술 등 표현이 강하다. 목에는 삼도가 두텁게 늘어져 비만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어깨는 빈약한 것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 통견의 법의는 앞가슴이 V자형으로 깊게 벌어지고 속에 수평으로 입은 내의가 보인다. 옷주름은 평행융기선으로 정제되어 있지 않으나 비교적 유연한 편이다.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양식을 살피는 데 있어서 조각 수법은 우수하지 못하지만 연대를 수반한 중요한 작품이다.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보조선사(804∼880)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며,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가 전체를 덮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장식해 놓았다. 비몸돌에는 보조선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하였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다.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국가유산청)

수달이 서식한다는 습지엔 부처꽃이 애초롭게
<부처꽃>
부처꽃은 우리나라 각처의 산과 들의 습지에서 나는 다년생 초본이다. 생육환경은 양지 혹은 반음지의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란다. 키는 약 1m 정도 되고, 잎은 길이는 3~4㎝, 폭은 1㎝ 내외로 끝은 뾰족하며 마주난다. 꽃은 자홍색으로 정상부 잎겨드랑이에서 3~5개 정도가 달리며 줄기를 따라 올라가며 핀다. 열매는 9월경에 긴 타원형으로 달린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전초는 약용으로 쓰인다.
예전에 부처님께 바칠 것이 없어서 길가에 흔하게 피어있는 이 꽃을 음력 7월 15일 백중날 부처님께 바친 것이 ‘부처꽃’이란 이름의 유래라고 합니다
[출처] 부처꽃 (야생화도감(여름), 2010. 6. 28.)

큰고들빼기는 언제나 의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