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485m이다. 진도에서 제일 높은 바위산이다. 백제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山城)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설치한 봉수대의 유적이 있다. 산밑에 운림산방(전남기념물 51)과 쌍계사(전남유형문화재 121)가 있으며, 쌍계사와 운림산방 일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천연기념물 107)에 둘러싸여 있다.
운림산방에서 산행을 시작해 460m봉을 지나 30분 정도 가면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진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산은 340m봉을 지나 쌍계사로 내려온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해탈문·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진도쌍계사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 건물로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 석가모니불 등 삼존불을 비롯하여 여러 점의 탱화와 소종·중종·법고가 있다. 그 가운데 중종은 종신에 적힌 명문에 따르면, 1686년에 조성되었으며 1720년에 다시 주조되었다. 명부전은 시왕전이 바뀐 이름으로 내부에 지장보살상을 비롯하여 모두 33점의 목조각상이 있다.
[출처] 쌍계사 [雙溪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상록수림 초입부부터 근사하게
겨울날의 상록수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난대림의 보고 상록수림대
약수터에서 물한모금
주작 덕룡 두륜 달마 땅끝기맥이 보입니다.
첨찰산
진도기상대
100km정도의 제주도가 보입니다 시계 최고입니다.
안국장님 한컷
나도 한컷
ST님도 심오하게 한컷
김사장님도 친구분과 한컷
작품번호 2018-2 먼시선
하산길의 마을풍경
하산길은 발걸음이 가벼워 진다
두목재(두무골재)
내친걸음 덕신산으로 진행
힘들었을 삶을 보여줍니다.
늦은 중식시간
사랑의 열매 청미래덩굴
<청미래덩굴>
산지의 숲 가장자리에서 자란다. 굵고 딱딱한 뿌리줄기가 꾸불꾸불 옆으로 길게 벋어간다. 줄기는 마디마다 굽으면서 2m 내외로 자라고 갈고리 같은 가시가 있다. 잎은 어긋나고 원형 ·넓은 달걀 모양 또는 넓은 타원형이며 두껍고 윤기가 난다. 잎자루는 짧고 턱잎이 칼집 모양으로 유착하며 끝이 덩굴손이다.
꽃은 단성화로 황록색이며 5월에 산형꽃차례[傘形花序]를 이룬다. 꽃줄기는 길이 15∼30mm이고 작은꽃줄기는 길이 1 cm 정도이다. 화피갈래조각은 6개이며 뒤로 말리고 6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있다. 씨방은 긴 타원형으로서 3심이며 끝이 3개로 갈라진다.
열매는 둥글며 지름 1cm 정도이고 9~10월에 붉은색으로 익으며, 명감 또는 망개라고 한다. 열매는 식용하며 어린 순은 나물로 먹는다. 뿌리를 이뇨 ·해독 ·거풍 등의 효능이 있어 관절염 ·요통 ·종기 등에 사용한다.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차이나 등지에 분포한다. 줄기가 곧고 가지가 많으며 잎이 작은 것을 좀청미래(var. microphylla)라고 한다.
[출처] 청미래덩굴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멋진 전망대도...
지나온 첨찰산을 되돌아 보며
돌아온 주차장
<운림산방>
조선 후기 화가 허유(許維:1807∼1892)가 만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 2011년 8월 8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하며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옆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은 운림각이라고 지었고 거실은 묵의헌으로 지었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화훼와 임목을 심었다. 하지만 허련이 사망하고 아들 허형이 운림산방을 떠나면서 매각되어 운림산방의 연못과 가옥은 예전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운림산방을 다시 사들였고 1982년 허형의 아들 허건이 운림산방의 예전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92년과 1993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철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 모습을 보고 이름지었다 한다.
[출처] 진도 운림산방[珍島 雲林山房]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정원 호수 섬위의 배롱나무가 압권
운림산방 배경으로
소치선생이 거처하던 집
소치선생이 기거하던 집
<소치 허련>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 관지(款識)에는 수치(叟痴), 노치(老癡), 칠십노치(七十老癡), 팔질노치(八耋老癡), 석치(石癡), 연옹(蓮翁) 등을 사용했다.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로 개명(改名)하였다.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1568~1662]의 후손이다. 아버지 허각(許珏)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완산 이씨와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큰아들 허은(許溵)에게 화업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을 잃은 후 뒤늦게 4남 허형(許瀅)의 재능을 발견하여 화필을 전수하였다.
[출처] 허련 [許鍊]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소치의 그림
문인화를 중심으로 특유의 필치를 구사한 허련의 회화는 당대에도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는 찬사를 들으면서 당시 화단을 풍미하였다. 허련은 조선 말기 한국의 남종문인화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이를 근대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 방손인 의재 허백련 등에게 계승되었고, 이들에 의해 호남 화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아 호남 남종문인화의 종조라 할 수 있다.
높이는 879.1 m이다. 부근의 오대산(五臺山)·월성봉(月城峰)·천등산(天燈山) 등과 함께 노령산맥의 북부 잔구군(殘丘群)을 형성하며, 수십 개의 봉우리가 6km에 걸쳐 솟아 있다. 이 산은 북쪽으로 흐르는 유등천(柳等川), 서쪽으로 흐르는 장선천(長仙川), 남쪽으로 흐르는 벌곡천 등 금강의 여러 지류에 의하여 화강암반이 동·남·북의 3면에서 오랜 두부침식(頭部浸蝕)을 받아 기암괴석을 이루고 있다. 즉 동쪽과 남쪽은 배치재를 분수령으로 하는 유등천과 장선천이 비교적 깊은 협곡을 이루고 이 골짜기를 전주~대전 간 국도가 지난다.
대둔산에는 태고사(太古寺)·안심사(安心寺)·신고운사(新孤雲寺) 등의 사찰이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최고봉인 마천대(摩天臺)·낙조대(落照臺)·월성고지(月城高地)·매봉[鷹峰]·철모·깃대봉 등의 경승지가 있으며, 충청남도 대둔산도립공원, 전북 대둔산도립공원 등으로 나뉘어 지정되어 있다. 동쪽 산기슭에는 옛 고을인 진산(珍山)이 있고 산중에는 산장과 구름다리·케이블카 등의 관광시설이 있다.
[출처] 대둔산 [大芚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대둔산 정상
대둔산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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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입구엔 상가들이 즐비하게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진행해 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케이블카로 오를 수도 있습니다.
초입부터 계곡 계단길 만만치 않네요
중턱의 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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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한숨 돌리고 다시금 오릅니다
동심바위...신라 문무왕때 국사 원효대사가 처음 이 바위를 보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3일을 이바위 아래서 지냈다는 동심바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동심바위 설명판
금강문 바위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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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문 설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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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문 위에 출렁다리가
오래돼서 더 무서운 구름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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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흔들
바위위에서 힘겹게 100여년을 살았을 소나무
1985년 완공되었다는 40m 길이의 삼선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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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계단 준공표지석
서남쪽 능선
정상부에서 본 케이블카 구름다리 삼선계단
남동쪽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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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장님도 한컷
이웃 산악회를 따라갔어요
마천대(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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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다리와 삼선계단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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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봉들
모이를 주면 산새들이 와서 물어가네요
낙조산장 하룻밤 머무를수 있으면 좋을듯 하네요
일몰이 멋지다는 낙조대
<태고사>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 한국 8경의 하나로 금강이라 일컫는 대둔산의 암봉인 마천대 아래 해발고도 878m의 능선에 있는 태고사는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법당으로 관음전, 무량수전, 대웅전, 산신각, 범봉각, 지장전, 요사채가 있으며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있다.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절터만 남았는데 1976년에 복원하였다. 원효대사가 태고사 절터를 찾고 기뻐서 3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하며, 만해 한용운이 태고사 전망을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태고사는 조계종 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만해 한용운은 “대둔산 태고사를 보지 않고 천하의 승지를 논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고사 [太古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칠성봉
용문굴
용문골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칠성봉에는 용문골을 빠쟈나온 용이 하늘로 승천하며 떨어뜨린 별7개가 바위 봉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구름다리 옆에서 등산객들 안전산행을 기원하고 있네요
등산 안내도
1592년(조선 선조 25년) 왜군이 경상도를 짓밟고 왜장 고바야가와의 2만 병력이 금산을 점령하고 나서 전라도를 침범하려던 차에 대둔산 아래 배티재에서 광주목사 권율장군이 1만5천명의 향군을 이끌고 밤에 왜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고 그 공으로 전라감사로 승진했고 뒤에는 도원수가 되었다.
이승리를 기리는 '원수권공이치대첩비(元帥權公梨峙大捷碑)'와 대첩사(大捷祠)를 고종때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에 세웠으나 일제대 일본인이 철거했고, 지금은 배티재 진산쪽 윗문산리 언덕에 새로운 대첩비가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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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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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대나무숲길
석식으로 송어회를...
<송어회>
송어 생선회로 예로부터 송어 양식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강원도 춘천 지역에서 특히 즐겨먹는 생선 요리이다. 송어는 연어목 연어과의 회귀성 어류이며, 본래 강가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다 산란기에 강으로 돌아가는 습성이 있다. 태어나는 곳을 근거하여 산천어로 분류되며, 고급 식용어로 예로부터 겨울 보양식으로 즐겨 먹었다. 최근에는 서식지가 줄어들어 자연산 송어는 찾기 힘들다. 회, 어죽, 조림, 매운탕 등으로 조리하여 먹을 수 있고, 특히 회로 즐겼을 때 담백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을 느낄 수 있다. 눈동자가 선명하며, 살이 투명하고 비늘에 상처가 없는 것이 싱싱한 송어이다.
송어는 싱싱한 것으로 준비하여 비늘을 긁어내고 내장부위와 지느러미, 머리, 꼬리 부분을 제거한 뒤 깨끗이 씻는다. 등지느러미 부분에 칼을 집어넣어 뼈와 살을 분리하고, 뼈를 제거한다. 껍질은 벗겨내 살에 남은 피는 깨끗하게 닦아낸다. 살은 먹기 좋은 크기로 포를 뜬 뒤 취향에 따라 초고추장이나 와사비를 섞은 간장에 찍어 먹는다.
송어는 양질의 단백질이 풍부하면서도 칼로리가 적어 체중조절 시 도움이 되는 식품이다. 또, DHA와 칼슘이 풍부하여 성장기 어린이는 물론 성인의 두뇌 발달과 치매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윗세 오름은 크고 작은 봉우리 세 개가 연달아 이어져 있는데, 제일 위쪽에 있는 큰 오름을 붉은 오름이라 하고, 가운데 있는 오름을 누운 오름, 아래쪽에 있는 오름을 족은 오름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윗세 오름 또는 웃세 오름으로 불렀다. 위에 있는 세오름이라는 데서 붙인 것으로, 아래쪽에 있는 세오름에 대응되는 것이다.
[출처] 윗세오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윗세오름
한라산 영실~돈내코코스
영실 오름길 우중산행 오늘 조망은 포기해야 겠어요
<영실 등산로>
영실 등산로는 길이 5.8km,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코스로, 한라산 코스 중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꼽힌다. 차로 등산로 앞, 1280m 고지까지 올라갈 수 있다. 백록담 밑에 남벽 분기점까지 가는 영실탐방로는 그나마 수월하게 오를 수 있어 초보자들에게도 추천하는 코스다. 백록담까지의 구간은 안전상의 문제로 통제되어 갈 수 없지만, 영실기암과 울창한 숲, 오백나한, ‘돌이 있는 자갈평지’라는 의미의 선작지왓, ‘위에 있는 세개의 오름’이란 뜻을 가진 윗세오름까지 볼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버스나 택시를 타고 왔다면, 내려갈 때는 어리목, 돈내코로 내려가며 다양한 풍경을 감상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쉼터엔 어김없이 까마귀 친구가...
비바람에 춥기까지 병풍바위는 보이지도 않고
서울엔 첫눈이 내렸다는데 이렇게라도 눈을 봅니다.
노루가 먹고다녔다는 노루샘
윗세오름
윗세오름 대피소 한라산 대피소 매점들이 모두 폐쇄라는군요.
모노레일을 이동하는 차량이 이렇게 생겼네요.
윗세오름 백록담 정상과 탐방로가 개방되기를 바라며
영실에서 윗세오름 남벽 돈내코로 진행해 봅니다.
비닐텐트의 위력을 실감해 보며
사약의 원료로 쓰인다는 천남성 열매가 곱기만 합니다
<천남성>
천남성은 우리나라 각처 숲의 나무 밑이나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생육환경은 토양이 비옥하고 물 빠짐이 좋은 곳에서 자란다. 키는 20~50㎝이고, 잎은 길이가 10~20㎝이고 5~10갈래로 갈라지며 긴 타원형이고, 작은 잎은 양끝이 뾰족하고 톱니가 있다. 꽃은 녹색바탕에 흰선이 있고 깔대기 모양으로 가운데 꽃 차례 중의 하나인 곤봉과 같은 것이 달려 있으며, 꽃잎 끝은 활처럼 말린다. 열매는 10~11월에 붉은색으로 포도송이처럼 달린다. 구근은 약용(유독성 식물)으로 쓰인다.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남쪽 서귀포로 흘러내리는 영천의 깊은 골짜기로 난대상록수림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 계곡이다.
계곡에는 돈내코계곡 내에는 희귀식물인 제주 특산 한란과 겨울딸기가 자생한다.그리고 계곡에는 높이 5m의 원앙폭포가 있는데 매년 음력 7월 15일 백중날 제주 여인들이 여름철 물맞이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배초향..
방어철이라 방어회도 이렇게
겨울이면 제주 남단의 모슬포가 북적인다. 방어가 제철이기 때문이다. 방어는 기름이 많은 생선으로 예로부터 식용 말고도 고래와 더불어 기름을 제조할 때 많이 쓰이기도 했다. 주로 염장을 해 조선시대부터 찌개로 많이 먹곤 했다.
<방어회>
붉은 살이 많은 방어는 시각적으로도 입맛을 돋운다. 뱃살에 기름이 오른 겨울 방어는 회로 먹을 때 간장과 초장 외에 양념간장에 찍어 먹어도 독특한 별미를 자아낸다. 우리나라는 제주의 마라도 주변에서 잡힌 방어를 최고로 쳐주는데, 몸집이 크고 육질이 단단해 회로 먹을 때 특히 그 맛이 좋다. 겨울철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인 방어회는 겨울 제주 여행에서 가장 먼저 맛 보아야 할 별미이다.
전북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에 위치한 산으로 비녀를 꽂은 여인을 닮아서 채계산, 수만 권의 책을 쌓아 놓은 형상이어서 책여산, 적성강을 품고 있어 적성산, 화산 옹바위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서 화산 등으로 불린다. 산 아래에는 맑은 섬진강이 흐르는 병풍처럼 아름다운 석산이다.
채계산 밑 적성강변에 천재지변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거대한 흰 바위가 있는데, 높이가 6자가 넘고 그 형상이 마치 백발노인이 우뚝 서 있는 모습과 같아 사람들은 이 바위를 화산옹이라 불러오고 있다. 얼핏 보면 늙은 사람과 같다 하여 화산 늙은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화산옹은 이상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전한다.
그것은 그 해 풍년이 들려면 색깔이 희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반대로 흉년이 들려면 색깔이 검은색을 띠게 된다. 또, 큰불이 난다거나 전염병이 퍼져 인명의 피해가 많은 해에는 바위 색깔이 파란색을 띠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붉은 색깔을 띠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채계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회문산 강천산과 함께 순창의 3대명산이라는 채계산(송대봉)
채계산 등산지도
오늘 가야할 채계산 능선
채계산은 적성강변 임동의 매미 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마치 비녀를 꽂은 여인이 누워서 달을 보며 창을 읊는 모습인 월하미인(月下美人)의 형상을 하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무량사에서 시작해 봅니다
당시 채계산 등산안내도
무량사가 신축공사를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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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계산 무량사
화산옹바위. 옛날 적성뜰에 비가 오지 않으면 원님은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준비하고 마음을 모아 기우제를 지냈던 곳
<화산옹바위>
순창의 명산인 채계산은 화산이라고도 불린다. 화산 아래에 적성강이 흐르고 있으며 그 강변에 거대한 흰 바위가 서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백발노인이 우뚝 서 있는 모습 같다 하여 사람들은 이 바위를 '화산옹'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화산옹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화산옹의 색깔이 희고 맑게 보이는 해에는 풍년이 들었고, 검은색을 띄면 흉년이 들었다. 또한 큰 불이 난다거나 전염병이 도는 해에는 파란색으로 변하였고, 전쟁이 나거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화산옹 앞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아이를 갖지 못한 아낙들은 그 앞에서 치성을 드렸다. 또한 화산옹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공손하게 경의를 표하고 지났고,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공손히 절을 하고 지나갔다. 이것은 화산옹이 영험한 바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한 병사(兵使)가 화산옹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를 수행하는 아장(亞將)은 화산옹의 영험함에 대해 병사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는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출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병사는 천하의 명장이 한낱 바위에 예를 갖추기 위해 말에서 내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그대로 말을 타고 유유히 지나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몇 발짝 가지도 못해서 잘 가던 말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러자 병사는 더욱 화가 나서 병졸들에게 화산옹을 부숴버릴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병졸들이 화산옹의 목을 치자 화산옹의 목에서 피가 흘렀고, 그 목은 데굴데굴 굴러서 적성강 물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 후로 화산옹의 영험은 사라지고 때아니게 천재지변과 괴변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끝내는 적성현이 폐허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산옹의 신비」 [華山翁-神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능선 고개(당재)
금돼지굴봉 정상. 묘가 써져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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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엔 문덕봉 고리봉 능선
채계산 칼날능선 입니다
금돼지가 원님부인을 희롱했다는 금돼지굴(펌)
<금돼지굴>
금돼지굴에는 적성 원님의 부인과 금돼지에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적성현에 부임하는 원님의 부인들마다 실종되는 일이 계속되자 새로 온 원님은 꾀를 내어 부인의 허리춤에 명주실 타래 하나를 매달아 두었다. 며칠이 지난 깊은 밤, 아니나 다를까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면서 원님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 뒤에 깨어난 원님이 부인을 찾아 명주실을 따라가 보니 바로 채계산 금돼지굴이었다. 그러나 돼지가 크고 용맹스러워 함부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원님은 이속들과 지키고 있으면서 기회를 노렸다. 이 때 굴 안에 있던 부인은 금돼지에게 희롱을 당하는 와중에 금돼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사슴 가죽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부인은 마침 가지고 있던 사슴 가죽으로 꾸민 문갑 열쇠 끈을 금돼지의 코에 가져다 대어 금돼지를 죽이고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돼지굴 [金-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유촌리 책암교 방면을 후일로 미루고서
풍악산너머로 지리주능선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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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당재로
들판에 생긴 마을입니다. 드론버전으로
지난 황금들녘 모습입니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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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재에서 황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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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굴앞 평편한 공터도 보이고
황굴입니다. 60년대 후반 경에만 해도 여기에 3칸짜리 절도 있었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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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봉이 눈앞에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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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강과 국도24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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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계산 정상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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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능선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최영장군이 무예를 닦았다는 장군바위 능선
고려 말 최영 장군이 그의 장인인 오자치(나성부원군)가 살던 장수군 산서면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 그가 치마대에서 화살을 날린 후 바로 말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화살이 날아오지 않아 화살보다 말이 늦게 도착했다고 판단했다. 이곳에서 불호령과 함께 단칼에 말의 목을 베어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화살이 바로 이곳 바위에 날아와 꽂혔다. 최영 장군은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한숨지었다.(순창누리집)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북쪽은 천길 낭떠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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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사면에 매달려 갑니다
칼바위 능선입니다. 안전시설이 보강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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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능선에 올라와 적성강(섬진강)도 보고
바위너머엔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
가을이 떠나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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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다리 공사가 한창
국내 최장이 된다는 구름다리 2019년 7월 완공예정으로 연장 270m의 구름다리 건설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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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24호선 도로변에 내려서고
남원 책여산에서 본 채계산(펌)
장가계 못지 않습니다
채계산은 강천산, 회문산과 함께 순창의 3대명산으로 불린다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얼굴 바위같아요
채계산 월하정
채계산 월하정에서 소리꾼들이 판소리를 익혔다고 하는데, 그중에 조선 말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1898∼1943)이 유명하다.
경상남도 밀양시의 단장면 구천리에 있는 산이다(고도 : 1,119m).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과 걸쳐있고, 최고봉이 수미봉이다. 산세가 수려하여 삼남금강(三南金剛)이라 부르며, 영남 알프스 산군(山郡)에 속하는 산이다. 산세는 부드러운 편이나 인근의 천황산, 능동산, 신불산, 취서산으로 이어지는 억새풀 능선길은 억새산행의 대표적이다. 재약산의 이름은 신라의 어느 왕자가 이 산의 샘물을 마시고 고질병이 나았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영정사(靈井寺)라 하였고, 약이 실린 산이라 하여 재약산으로 이름 지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재악산(載嶽山)은 부에서 동쪽 41리 떨어진 곳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광여도』에도 재악산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경상도읍지』(1895)에는 지금의 이름과 같은 재약산으로 되어 있다. 다만 『조선지형도』에는 천황산만 보인다. 서쪽 산기슭에 있는 유명한 대찰(大刹)인 표충사(表忠寺)를 비롯하여 부근에 폭포 2개가 연이어 있는 칭칭폭포[層層瀑布, 毘盧瀑布], 무지개가 걸리는 금강폭포 등 명소가 있다. 천황산의 북쪽 사면에는 가마볼·호박소[臼淵] 등의 명소 외에 단열냉각에 의한 물리적 현상으로 여름에도 골짜기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이 있다.
높이는 1,189m이고, 주봉(主峰)은 사자봉이다. 남쪽 5km 부근에 솟아 있는 재약산(載藥山:주봉은 수미봉 1,018m)과 맥이 이어져, 천황산을 재약산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이러한 혼동은 천황산이 일제강점기 때 붙은 이름이라 하여 '우리 이름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사자봉을 재약산 주봉으로, 재약산을 수미봉으로 부르면서 생겨났다.
산세가 수려하여 삼남금강(三南金剛)이라 부르며, 인근 일대의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준봉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 산군(山郡)에 속하는 산이다. 산세는 부드러운 편이나 정상 일대에는 거대한 암벽을 갖추고 있다. 수미봉·사자봉·능동산·신불산·취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드넓은 억새평원으로서 사자평 고원지대라고 부르는데, 일대는 해발고도가 800m에 달해 목장으로 개발되어 있다.
서쪽 산기슭에 있는 유명한 대찰(大刹)인 표충사(表忠寺)를 비롯하여 부근에 내원암(內院庵)·서상암(西上庵) 등의 절과, 높이 20m의 폭포 2개가 연이어 있는 칭칭폭포[層層瀑布:毘盧瀑布], 무지개가 걸리는 높이 25m의 금강폭포 등 명소가 있다. 천황산의 북쪽 사면에는 가마볼·호박소[臼淵] 등의 명소 외에 단열냉각에 의한 물리적 현상으로 여름에도 골짜기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천연기념물 224)이 있다.
[출처] 천황산 [天皇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천황산 정상
산행개념도
얼음골 방면
죽전마을 방면
표충사에서 산행시작 결전(?)의 의지를 불태움
약 1,300여년전에 지어진 표충사
재악산 표충사(일주문)
사찰 가는길이 세월을 말해주는듯
표충사 경내에 들어섭니다.
표충사 너머 가야할 수미봉과 사자봉이...
<표충사>
1976년 9월 30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중심으로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물리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 3대사(大師)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에 제자들이 건립한 사우(祠宇)로 같은해 사액을 받았다.
표충사는 대흥사 남단에 자리잡고 있으며 건물의 배치는, 돌담의 안쪽 중앙에 북향(北向)으로 사당이 있고 그 좌우측 아래편에는 조사전(祖師殿)과 표충비각(表忠碑閣)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표충사 외곽에 있는 재실 건물이던 의중당과 강례재 주위에 담을 두르고 솟을삼문을 세워 사문(祠門)으로 삼고 있다.
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로 깐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2벌대의 바른층쌓기한 기단 위에 막돌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가 놓이고 그 머리는 창방으로 결구시켰다.
공포는 행공첨차를 두어 외부로 일출목을 둔 주심포계의 이익공 양식이며 보머리에는 조각된 계두형상(鷄頭形狀)이 부착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전·후방 평주(平柱) 위에 대량(大樑)을 걸고 그 위에 종량(宗樑)을 얹힌 5량(樑) 구조이다. 도리는 굴도리를 사용하였고, 중도리 밑으로는 뜬 창방을 걸고 그 사이에는 같은 간격으로 소루(小累)를 배치하였다. 천장은 종량의 상부에만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그 외에는 빗천장을 가설하였으며 처마는 겹처마로 되어 있다.
비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내부에 서산대사와 건사사적비(建祠事蹟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조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전각(殿閣)이다. 그밖에 경내에는 의중당, 명의제, 강내제 등의 건물이 있다.
[출처] 표충사 [表忠祠]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정갈한 숲속길
계곡수도 어찌 이리 맑은지...
황방울자매
본격적인 산행의 시작
오름길에 잠시 휴식
흑룡폭포 입니다. 새로이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네요
흑룡폭포 배경으로 한컷
흑룡폭포
온통바위산
데크길도 잘 정비되어 있고
층층폭포
밀양시의 단장면 구천리에 있는 폭포이다. 천황산에 속한 표충사 남쪽 계곡을 따라 사자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폭포이다. 사자평은 100만 평을 넘는 분지로, 층층폭포의 수량에 영향을 주어 폭포를 떨어지는 수량은 많은 편이다. 폭포높이는 30미터로 장관을 이룬다. 이 일대의 아름다운 수석(水石)을 일컬어 옥류동천(玉流洞天)이라 하는데, 이 폭포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경관이다. 사자평 끝에서 떨어지는 물이 절벽에 층을 지어 떨어진다 하여 칭칭폭포라 하였고, 그 아래 소(沼)와 골짜기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비로폭포(毘盧瀑布)라고도 부른다.
사자평(獅子坪)에는 밀양8경 중 8경에 해당하는 40만㎡의 사자평 억새평원이 있다. 또한 국내 최대 규모의 사자평 산지 습지는 면적이 약 58만㎡에 이르며, ‘재약산 산들늪’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자평 산지 습지는 2006년 12월 28일에 환경부 습지 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과거 사자암(獅子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하여 사자평으로 부르게 되었다. ‘칡밭’이라고도 한다.
사자평은 재약산의 주봉인 사자봉에서 수미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동남쪽에 있다. 수미봉에서 남서쪽으로 문수봉과 관음봉으로 산지가 이어지고 사자평 고원 지대를 넘어서는 향로산과 향로봉이 남쪽으로 이어진다. 사자평 고원 지대에서는 이러한 산지 사이로 시전천이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해발 고도 700~800m 정도를 이루는 사자평 고원 지대와 시전천 상류 구간 사이에는 층층폭포와 흑룡폭포가 있다. 사자평 지역은 재약산 수미봉 유역의 남동쪽 집수 구역에 위치하여 과거 농경지와 목장으로 이용될 만큼 우수(雨水)를 통하여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문(水文) 특성으로 다양한 습지 식생이 분포하는 환경을 이루어 지금은 대부분의 지역이 환경부 습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자평에서는 오래전부터 화전민이 밭을 일구어 살면서 고랭지 채소와 약재를 재배하여 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목장을 운영하였다.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1966년 4월 29일부터 1996년 3월 1일까지 운영]가 개설될 만큼 40여 가구가 거주하였으며 아직도 거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자평은 밀양을 대표하는 대찰인 표충사의 배후 산지에 자리하며 영남알프스 산지 산행의 대표적인 코스이다. 산지 습지 주요 생물의 서식처를 이루고 있어 생물 다양성과 생태 교육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습지 보호 지역 및 주변에 분포하는 참억새 군락은 광활한 면적과 계절에 따른 변화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뛰어난 경관을 연출한다.
[출처] 사자평 [獅子坪]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벌개미취도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꽃향유도 만개만개 이만개
재약산을 오르며
<재약산>
재약산(載葯山)은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동쪽에 있는, 해발 고도 1,108m의 산이다. 봉우리 이름으로는 수미봉(須彌峰)에 해당한다.
재약산의 원래 이름은 ‘재악산(載嶽山)’이었다. 신라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 약수를 찾아 두루 헤매다 재악산의 영정약수를 마시고 고질병이 나았으므로 부왕의 특사로 현재의 표충사 자리에 큰 가람을 지어 절 이름을 ‘영정사(靈井寺)’, 산 이름을 약이 실린 산이라 하여 ‘재약산(載葯山)’으로 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재약산의 북쪽에 있는 천황산을 ‘재약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황산을 ‘재약산’이라 부르는 것은 1925년경 일본 사람들이 측량을 하는 과정에서 ‘천황산’이라는 명칭을 사자봉(獅子峰)에 잘못 붙였다는 주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87년에 간행한 『밀양지』는 ‘재약산’을 주봉인 사자봉과 제2봉인 수미봉을 아우르는 여러 봉우리의 총칭으로 불러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약산[수미봉]과 천황산[사자봉]은 인근 일대의 해발 고도 1,000m 이상의 준봉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 산군(山群)에 속한다. 재약산 서쪽 산기슭에는 유명한 대찰(大刹)인 표충사(表忠寺)를 비롯하여 부근에 내원암(內院庵)·서상암(西上庵) 등의 절이 자리 잡고 있다. 재약산 사자평의 억새는 밀양8경 중 8경으로 잘 알려져 있고, 층층폭포에서 상류 2㎞ 지점에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1966년 4월 29일부터 1996년 3월 1일까지 운영]가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다.
[출처] 재약산 [載葯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재약산(수미봉) 도착 어린친구들이 그래도 끝까지 왔어요
여성회원들만
사자평 모습 700m대에 어찌 이런 평지가 있을수 있는지
김고문님은 억새밭이 무척 잘어울리는듯
Mr 억새 선발대회가 있다면 순위안에 들듯
억새는 실컷보고
천황재의 억새모습
<억새>
산과 들에서 자란다. 높이 1∼2m로, 뿌리줄기는 모여나고 굵으며 원기둥 모양이다. 잎은 줄 모양이며 길이 40∼70cm, 너비 1∼2cm이다. 끝이 갈수록 뾰족해지고 가장자리는 까칠까칠하다. 맥은 여러 개인데, 가운데맥은 희고 굵다. 밑동은 긴 잎집으로 되어 있으며 털이 없거나 긴 털이 난다. 뒷면은 연한 녹색 또는 흰빛을 띠고 잎혀는 흰색 막질(膜質:얇은 종이처럼 반투명한 상태)이며 길이 1∼2mm이다.
꽃은 9월에 줄기 끝에 부채꼴이나 산방꽃차례로 달리며 작은이삭이 촘촘히 달린다. 꽃차례 길이는 10∼30cm이고 가운데축은 꽃차례 길이의 절반 정도이다. 길이 4.5∼6mm의 작은이삭은 노란빛을 띠며 바소 모양에 길고 짧은 자루로 된 것이 쌍으로 달린다. 밑동의 털은 연한 자줏빛을 띠고 길이 7∼12mm이다.
제1 포영(苞穎:작은이삭 밑에 난 1쌍의 포)은 윗부분에 잔털이 나고 5∼7개의 맥이 있으며 제2 포영은 3개의 맥이 있다. 끝이 2갈래로 갈라진 호영(護穎:화본과 식물 꽃의 맨 밑을 받치고 있는 조각)에서 길이 8∼15mm의 까끄라기가 나온다. 내영(內穎:화본과 식물의 꽃을 감싸는 포 중 안쪽에 있는 것)은 길이 약 1.5mm로서 작으며 수술은 3개이다. 뿌리는 약으로 쓰고 줄기와 잎은 가축사료나 지붕 잇는 데 쓴다. 한국(전지역)·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출처] 억새(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억새가 절정입니다
건너편 간월산 간월재 신불산 모습
셀카도 한장
용의 쓸개처럼 효능이 있다는 용담도 보이고
아빠를 따라온 세윤이도 열심히
지나온 재약산의 모습
해가 뉘엿뉘엿
천황봉 오름길
멀리 어렵게 와서 기여이 천황산(사자봉)까지 오름
회장님 한컷
떠날꺼야님도 한컷
나도 한컷
시상이 떠오릅니다.
산행은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장거리 산행으로 시간이 빠듯한줄 알면서도 밀양시장님이 주시는 술은 그냥 마시면 되는 줄 았았습니다.
1000고지 이상에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도 시간되면 내려갈 줄 았았습니다.
아이들이 셋이나 따라 왔는데도 보호자가 있어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가다 지치면 케이블카를 찾아 타고 내려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케이불카 운행시간이 끝났어도 사정해보지도 않고 그냥 내려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밤중 후레쉬도 없이 1000고지에서 300고지까지의 계단길을 조그만 가면 되는줄 았았습니다.
무박2일의 무박이 앞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 안전하게 귀가함에 대하여 다시한번 참석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하산길
이후 케이블카로 하산을 계획하였으나 케이블카 운행이 멈춰 그냥 야간에 하산실행 ......
그후로 오랫동안 (뒷이야기는 비하인드 스토리)
얼음골케이블카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는 1998년부터 민자 사업으로 추진되었는데, 인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밀양 남명리 얼음골(密陽南明里얼음골)[1970년 4월 27일 천연기념물 지정]의 환경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로 중단되었다. 2007년 3월 케이블카 노선을 변경하고, 2008년 사전 환경성 검토와 문화재 현상 변경 허가, 2009년 공원 계획 변경 결정 승인 등을 거쳐 2010년 향토 기업인 한국화이바의 자회사인 에이디에스레일에서 공사를 시작하였다. 2012년 9월 21일 준공하였고, 2012년 9월 22일 운행에 들어갔다.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는 상부 승강장의 건축물 높이 문제 등 일부 「자연공원법」 위반이 드러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2012년 11월 12일 운행을 일시 중단하였다. 운영 주체인 에이디에스레일은 상부 승강장 높이와 관련된 법적 미비점과 4층 대피소 면적 축소를 해결하고, 야간 조명을 간접 조명으로 변경하는 등 자연 친화적인 시설 설치와 조경 작업을 실시한 후 2013년 5월 2일 재개장하였다.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는 연면적 740.26㎡, 건축 면적 382.26㎡의 넓이에 4선 교주식이며, 선로 길이는 1,753m이다. 왕복식 케이블카의 운행 속도는 초당 4m, 탑승 인원은 50명이다. 상부 승강장의 해발 고도는 1,020m이며, 표고 차는 669m이다.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는 산내면 삼양리 구연마을에서 천황봉 진참골 남측 정상을 오간다. 상부 승강장에서 내려 하늘사랑길이라 불리는 약 250m의 데크길을 따라가면 전망대인 녹산대에 도착한다. 녹산대는 1,100m 고지에 있어 신선한 공기와 천황산 주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의 운행 시간은 오전 8시 30분[3~9월 오전 9시 20분]부터 오후 5시 50분[12~2월 오후 4시 50분]까지이며, 소요 시간은 편도 10분, 운행 간격은 20분이다. 하부 승강장에는 매표소와 카페, 식당, 편의점, 주차장 등이 있다.
높이 639m. 한반도 최서남단 흑산면 가거도에 불끈 치솟은 산으로 주봉은 독실봉이다. 신안군의 크고 작은 840여 개 섬과 한국의 국립공원 중 최대인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최고봉이다. 흑산도 주봉 깃대봉(378m)보다 261m 더 높고 삼척∼옥천∼목포로 내달리는 옥천지향 사대(沃川地向斜帶)의 모산 유달산(儒達山:228m)보다 세 배 가까이 높다.
중생대 쥐라기 습곡운동과 백악기 화산활동 때 산성화산암이 해안에서 솟구친 이 산은 '송아지열매'라는 한자명이 있을 뿐 내력과 기록이 없다. 흑산도가 검은 어미소라면 가거도는 송아지새끼쯤 되고, 흑산도가 선캄브리아대의 소백산 편마암류에 속하고 서남부의 하태도가 불국사층 화강암이므로 그 중간쯤일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이 섬은 소도 키우지만 흑염소를 많이 키운다.
길은 1구대리[큰말]에서 2구항리[목리]로 넘는 삿갓고개에서 산정 밑까지 있다. 큰말에서 2시간 거리인 꼭대기는 옛 절터로 금지구역이라 출장소나 이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가거8경 중 서남해의 스카이웨이 제1경 독실산 정상의 조망은 구름과 해미가 산허리를 두른 반공중에 떠서 손들면 옥빛 하늘이 잡힐 듯, 한 발 내딛으면 수평선의 쪽물이 묻을 듯 '가히살만한섬[可居島]'의 신선놀음이다.
용왕 아들의 사랑 얽힌 제2경 회룡산·장군바위·선녀봉과 녹섬, 표류한 귀공자 석순과 처녀신녀(神女)의 비련 서린 3경 돛단바위와 기둥바위, 어부의 아내가 유복자를 안은 4경 섬둥반도 절벽과 망부석, 5경 구곡앵화와 빈주암, 6경 소등일출과 망향바위 및 약수, 남문과 해상터널, 낚시터가 좋은 구굴도 전경이 멋지다.
맑은 날 제주도도 보이고 상해 닭소리도 들리지만 조류 탓으로 쾌청일수가 연70 일(국내평균 81)로 안개가 많다. 이런 천혜의 조건은 천리향·향나무·동백나무·후박나무 등이 무성한 아열대숲에 대엽풍란·소엽풍란·죽란·새우난초·춘란·콩짜개난 및 약초 향기를 풍긴다. 목포∼흑산∼가거 쾌속선(4시간)에 오르면 《자산어보(玆山魚譜)》에 행어(行魚)로 나오는 《멸치잡이노래》도 고소하다.
[출처] 독실산 [犢實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독실산(犢實山)'으로 송아지가 후박나무 열매를 먹고 자란다는 뜻이다.
가거도에 지천으로 많아 전국 후박 나무의 70%를 점할 정도란다.
가거도 독실산 산행지도
고양이를 닮았다는 가거도
조선시대에는 가가도(佳嘉島, 可佳島, 家假島)로 불리다가 1896년부터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가거도(可居島)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소흑산도로 지명이 바뀌었다가, 다시 가거도로 불리고 있다.
본래 흑산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리·대풍리·항리를 합하여 무안군 흑산면 가거도리가 되었다. 1969년에 신안군이 무안군에서 분군함에 따라 신안군 흑산면으로 개편되었다.
6.25 전쟁 당시 전쟁 난 줄도 모르고 있다 전쟁이 거진 끝나고 나서야 전쟁이 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닭이 울면 들린다고 할 정도로 중국과 가깝지만, 직선 최단거리는 385㎞로 부산 해운대구에서 경기도 군포시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해무(海霧)가 없는 날이면 가거도에서 제주도와 추자도가 보인다.
가거도항 도착(목포에서 뱃길로 233km, 쾌속선으로 4시간 30분정도 소요된듯)
숙박지 둥구펜션
가거도만의 독특한 풍경
가거도 낚시 포인트라네요
우리나라 최서단
섬 전체가 거의 산림지대이고, 경지가 적어 소량의 채소류를 재배할 뿐 주민의 대다수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변 해역은 조기를 비롯한 각종 어족의 월동구역으로 조기·멸치·전복·농어 등이 잡힌다. 산 전체가 후박나무 서식지로 후박나무 껍질을 채취하여 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출처] 가거도 [可居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김부연 하늘공원>
가거도항 정상부에 잡초와 키 작은 나무들이 있을 뿐 온통 바윗덩어리. 뒤쪽의 절개 부분은 바위산을 깎아내어 가거도항을 만들 때 골재로 사용했다.
깎아낸 곳은 나무 데크를 설비한 암벽체험길 등이 있는 하늘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이름이 독특하다. 김부연 하늘공원. 안내판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김부연은 4월혁명 당시 학생신분으로 참여해 순국한 가거도 출신 열사였다.
하늘별장에 도착
층층잔대 너무 사랑스러워요
<층층잔대>
원산지는 한국으로, 산과 들에 흔히 자란다. 높이 1m 정도로 자란다. 뿌리를 먹을 수 있는 식물로, 그 모양이 도라지나 더덕과 비슷하나 조금 더 길고 가늘다. 줄기에 긴 타원형의 잎이 3∼5개 돌려나는데 잎의 가장자리에는 거친 톱니가 있다. 뿌리에 붙는 잎에는 긴 잎자루가 달리나 꽃이 필 때가 되면 없어지며 줄기에 나는 잎에는 잎자루가 없다.
7월에서 9월까지 종 모양의 연보라색 꽃이 핀다. 꽃은 원추꽃차례[圓錐花序]로 층층이 돌려나며 암술대가 화관 밖으로 뻗어 나온다. 열매는 삭과(蒴果)로 11월에 씨가 익는다. 잔대속에 속하는 여러 종들 가운데 특히 농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는 종이다. 씨뿌림이나 포기나누기로 번식한다. 한방에서 뿌리는 사삼(沙蔘)이라 부르는데 거담·진해·해독 등에 효과가 있다.
[출처] 층층잔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최서단을 배경을 한컷
아침이면 중국의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나 어쩐다나
서단에서본 독실산
가거도는 멀다.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36km, 흑산도에서 남서쪽으로 65km 떨어져 있다. 쾌속선으로 4시간 30분이 걸리는 까닭에 큰 맘 먹지 않고는 찾기 힘든 곳이다. 가거도에 가는 것만 꼬박 하루를 잡아야 할 정도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거도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워낙 먼 곳이라 낚시꾼들이 알음알음 찾아 들어가는 섬이었지만 요즘은 여행객들도 찾아들고 있다.
[출처] 가거도 대한민국 최서남단 섬, 그곳에 가다 (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관광공사, 최갑수)
최서단
가거도(저항시인 조태일)
너무 멀고 험해서 / 오히려 바다 같지 않은 / 거기 / 있는지조차 / 없는지조차 모르던 섬
쓸 만한 인물들을 역정 내며 / 유배 보내기 즐겼던 그때 높으신 분들도 / 이곳까지는 / 차마 생각 못했던,
그러나 우리 한민족 무지렁이들은 / 가고, 보이니까 가고, 보이니까 또 가서 / 마침내 살 만한 곳이라고 / 파도로 성 쌓아 / 대대로 지켜오며 /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 당할아버지까지 한데 어우러져 / 보라는 듯이 살아오는 땅
갈수없는 끝자락
영화촬영지
너무나도 어렵게 독실산 정상에 섰어요
가거도에는 신안군 일대에서 가장 높은 최고봉 독실산이 있다. 독실산은 639m 높이로 우리나라 섬에 있는 산으로는 제주도의 한라산(1950m), 울릉도의 성인봉(984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독실산 인증샷
안나푸르나팀이 다시금 뭉쳤어요
정상부의 깨어진 바위
독실산 설명석
이질풀 이쁘지 않은것이 어디 있으리오?
<이질풀>
노관초라고도 한다. 산과 들에서 자란다. 높이 약 50cm이다. 뿌리는 곧은뿌리가 없고 여러 개로 갈라지며, 줄기가 나와서 비스듬히 자라고 털이 퍼져 난다. 잎은 마주달리고 3∼5개로 갈라지며 나비 3∼7cm이고 흔히 검은 무늬가 있다. 갈래조각은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으로서, 끝이 둔하고 얕게 3개로 갈라지며 윗부분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잎자루는 마주나며 길다.
꽃은 8~9월에 연한 붉은색, 붉은 자주색 또는 흰색으로 피며 지름 1∼1.5cm이다. 잎겨드랑이에서 꽃줄기가 나오고 꽃줄기에서 2개의 작은꽃줄기가 갈라져서 각각 1개씩 달린다. 작은꽃줄기와 꽃받침에 짧은 털과 선모(腺毛)가 나고, 씨방에 털이 난다. 열매는 삭과(蒴果)로서 길이 1∼1.2cm이고 5개로 갈라져서 뒤로 말린다.
많은 양의 타닌과 케르세틴이 들어 있어 소염·지혈·수렴·살균 작용이 있다. 민간에서는 대장 카타르·이질·위궤양·십이지장궤양 등에 약재로 사용하고, 한방에서는 현초(玄草)라고 하며 지사제로 쓴다. 한국·일본·타이완에 분포한다.
[출처] 이질풀 [Thunberg's geranium]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되돌아본 독실산
송년우체통
가거도의 최서단
산박하 그저 고마울 따름이고
되돌아본 독실산
가거도 최서단
회룡산에서 본 대리마을
회룡산 인증샷
돌아본 독실산
용왕의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 용암이 되어 선녀들이 많이 울었다고...
해안가의 모습이 스케일이 남다르다
<섬등반도> 가거도 서쪽에 있는 기암절벽 형태의 반도이다. 2020년 9월 2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신안 가거도 섬등반도는 섬 전체가 태고의 자연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해안선을 둘러싼 해식애 등의 지형이 수려한 풍경을 이루고 있어 경관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또한 대한민국 국토 최서남단에 있는 섬이라는 상징성이 있으며, 다양한 식생과 지형을 가진 섬으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9월 2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신안 가거도 섬등반도 [新安 可居島 섬등半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말오줌때
콩짜개덩굴...제주 식생과 비슷해요
울릉도와 비슷하기도...
해수욕장이라는데...
9월의 억새능선은 황홀하가까지 합니다
김부연 하늘길에서 본 대리
산국으로 보여집니다
달뜬목
멸치잡이축제
가거도에 전승되는 어로요(漁勞謠) 멸치잡이 노래 한 대목이다.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는 놋소리, 멜 모는 소리, 그물 넣는 소리, 그물 안 멸치를 배 안에 퍼 담을 때 부르는 술배소리, 그물 올리는 소리 등 모음곡 형식의 9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988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다.
만경창파 노는 멸치,
우리가 널 모를손가,
너는 죽고 나는 살자~
만경창파에 흐르는 재물 건진 자가 임자로세,
우리 배 임자 재수 좋아 간 데마다 만선일세
우리 고장에 들어온 멸치 우리 배 망자로 다 들어온다~
[출처]가거도 [可居島] -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에 취하는 비경의 섬 (한국의 섬 - 신안군, 2021. 04. 30., 이재언)
가거도 등대
1907년 12월 처음 불을 밝혔던 이 등대는 가거도 북쪽 해안 끝 해발 84m인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1구와 너무 멀어서 좀처럼 관광객들이 올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 등대 주위를 펜션처럼 예쁘게 시설해 두어 여행자의 눈길을 끈다. 등대지기로부터 커피 한 잔을 대접받았다. 청년 등대지기가 방명록을 내밀기에, '부족하지만 등대처럼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썼다. 이렇게 먼 섬에서 등대지기를 하면 외롭지 않느냐는 물음에,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접하고 육지의 가족들과 메일도 주고받아 외롭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출처] 가거도 [可居島] -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에 취하는 비경의 섬 (한국의 섬 - 신안군, 2021. 04. 30., 이재언)
< 가거초(可居礁) >
가거도에서 서남쪽으로 47㎞ 지점에 있는 암초이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3월 29일 일본군함 휴가호(ひゅうが, 日向號)가 이 암초에 부딪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일본군은 사고 후 정밀조사를 실시한 뒤 휴가호(ひゅうが, 日向號)의 이름을 따서 일향초(日向礁)라고 불렀다. 이후 가거도 주민들의 지명 변경 요구에 따라 2006년 12월 해양지명위원회에서 가거초라고 명명하였다.
최천수심(最淺水深) 7.8m이며, 크기는 가로 3㎞, 세로 1㎞이다. 높낮이 차이가 최대 50여m에 이르는 기둥 모양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다양한 수중생물이 서식하고 있다. 자원과 기상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에 적합한 곳으로서 이어도해양과학기지에 이은 2번째 종합해양과학기지가 건설되어 2009년 10월 준공되었다. 이 기지는 종합 해양·기상관측소 역할을 하면서 태풍의 구조 및 특성에 관한 연구와 어황·해황 예보, 황사 등 대기오염물질의 이동 및 분포 상황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함평군의 해보면과 영광군 불갑면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고도:339m). 불갑산 다음으로 높은 산봉우리이며, 불갑산 남서부 줄기와 바로 이어진다. 산 아래에 용천사(龍泉寺)라는 절이 있다. 함평천의 지류인 내동천과 불갑천의 발원지이다. 용천사 계곡에는 희귀식물인 꽃무릇[相思花]이 수백만 주 자생하고 있다. 『대동지지』(함평)에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영광과 경계를 이룬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광)에 모악산은 "함평군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함평현에서도 보인다. 산중에 용굴이 있는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가뭄에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함평군지』에 "모악산은 해보면에 있고, 불갑산에서 직락(直落)하여 구름 사이에 솟아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용천사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광여도』와 『지승』에는 지명이 표기되지 않으나, 『1872년지방지도』(함평)에 모악산이 무악산(毋岳山)으로 표기되어 대야면의 북편에 자리잡고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와 현대지형도에도 지명 표기가 없지만 『군세일반』(함평)의 지도에 불갑산과 무악산이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평군)과 『1872년지방지도』(함평)에는 무악산(毋岳山)으로 표기되어 있어 모(母)와 무(毋)가 혼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모악산 [母岳山]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2010. 12.)
모악산 정상(표지판이 이상하다)
함평방면 모악산 개념도
모악산 개념도
축제는 끝났지만 불갑사입구 보리밥집엔 대기표를 받아야 하네요
불갑사 일주문 축제는 현재 진행형
<불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창건시기가 분명하지 않아 384년(침류왕 원년)에 마라난타가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백제 문주왕 때 행은이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 중창하였고,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가 머무르면서 크게 중창하였는데 당시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사전(寺田)이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정유재란을 겪은 이후 법릉이 중창하였고 1634년에는 해릉이 중창하였는데, 여러 차례 중창을 거치면서 절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다. 1802년(순조 2)에는 득성이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였다. 또 869년(고종 6)에는 설두가, 1876년(고종 13)에는 설파가, 1879년(고종 16)에는 동성이 각각 중창하였다. 1938년에 설제가 중수하였고, 1984년에도 중수가 이어졌으며 1996년에 기와를 새로 입히는 등 보수를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대웅전(보물 830)을 비롯하여 칠성각, 일광당, 만세루, 범종루, 향로전, 천왕문(전남유형문화재 159) 등이 있다. 또한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전남유형문화재 제340호), 목조 석가여래삼존좌상과 나한상 일괄(전남유형문화재 제341호)도 있다. 이외에 각진국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이 700년 정도 된 참식나무(천연기념물 112)가 있다.
[출처] 불갑사 [佛甲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고목나무엔 소원들이 매달린듯
양지녘엔 꽃무릇이 절정입니다
불갑사앞 꽃무릇 단지
소원들이 매달린 소원터널
모악산 정상(정상 표지가 잘못되어 있어요)
용천사쪽 야생멧돼지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동족상잔의 비극이...
삽주(창출)
<삽주>
산지의 건조한 곳에서 자란다. 뿌리줄기는 굵고 길며 마디가 있고 향기가 있다. 줄기는 곧게 서고 윗부분에서 가지가 몇 개 갈라지며 높이가 30∼100cm이다. 뿌리에서 나온 잎은 꽃이 필 때 말라 없어진다.
줄기에 달린 잎은 어긋나고, 줄기 밑 부분에 달린 잎은 깊게 깃꼴로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은 3∼5개이고 타원 모양 또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긴 타원형이며 표면에 윤기가 있고 뒷면에 흰빛이 돌며 가장자리에 가시 같은 톱니가 있고 잎자루의 길이가 3∼8cm이다. 줄기 윗부분에 달린 잎은 갈라지지 않고 잎자루가 거의 없다.
꽃은 암수딴그루이고 7∼10월에 흰색으로 피며 줄기와 가지 끝에 두상화(頭狀花:꽃대 끝에 꽃자루가 없는 작은 꽃이 많이 모여 피어 머리 모양을 이룬 꽃)가 1개씩 달린다. 포는 꽃과 길이가 같고 2줄로 달리며 깃꼴로 갈라진다. 두상화는 길이가 15∼20mm이고 20∼30개의 관상화가 있다.
총포는 길이 17mm의 종 모양이고, 총포 조각은 7∼8줄로 배열하며 바깥쪽 조각은 타원 모양이고 가운데 조각은 긴 타원 모양이며 안쪽 조각은 줄 모양이다. 관상화의 화관은 끝이 5개로 갈라진다. 열매는 수과이고 털이 있으며 길이 8∼9mm의 갈색 관모가 있다.
한방에서는 뿌리줄기를 창출(蒼朮)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발한·이뇨·진통·건위 등에 효능이 있어 식욕부진·소화불량·위장염·감기 등에 사용한다.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다. 한국 ·중국 동북부·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비슷한 종류로 잎자루가 없는 것을 용원삽주(A. koreana)라고 한다.
[출처] 삽주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단정한 용천사의 모습
<용천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600년(백제 무왕 1) 행은(幸恩)이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대웅전 층계 아래에 있는 용천(龍泉)이라는 샘에서 유래한다. 이 샘은 황해로 통하며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645년(의자왕 5) 각진(覺眞)이 중수하고, 1275년(고려 충렬왕 1) 국사 각적(覺積)이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세조와 명종 때 중수하여 큰 절로 성장하였다. 《용천사대웅전현판단청기》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600년(선조 33) 중창하였고, 1632년(인조 10)에는 법당을 새로 지었다. 1638년(인조 16)과 1705년(숙종 31)에 중건하고, 1938년에 중수했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1964년에 금당이 옛 보광전(普光殿) 자리에 대웅전을 새로 세우고, 요사채도 지어 절의 면모를 바꾸었다. 1996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범종각·웅진당·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용천사석등과 해시계 등이 전한다. 이 중 1981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된 석등은 높이 2.38m로 1685년(숙종 11)에 제작된 것이다. 짜임새가 투박하지만 하대석에 거북이 조각되어 있다. 해시계는 석등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6·25전쟁 때 잃어버렸다가 1980년 경내 흙더미 속에서 발굴된 것이다. 본래는 높이 14cm, 가로 세로 각 39cm의 정사각형이었으나 지금은 절반이 떨어져나간 상태이다. 하지만 낮시간에 해당되는 묘시(卯時)부터 유시(酉時)까지는 남아 있어 사용하는 데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밖에 대웅전에는 18세기 때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2000년 5월에 도난당하였다.
[출처] 용천사 [龍泉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용이 승천했다는 용샘입니다
용천사 부도탑의 모습
3년전 용천사 부도탑
제방쪽엔 아직 한창
용이 승천 직전인듯 합니다
3년전 용천사 꽃무릇 군락지(올해는 1주일 정도 늦은듯)
석산(꽃무릇)
<석산(꽃무릇)>
꽃무릇이라고도 한다. 원산지는 중국으로, 절에서 흔히 심고 산기슭이나 풀밭에서 무리지어 자란다. 비늘줄기는 넓은 타원 모양이고 지름이 2.5∼3.5 cm이며 겉껍질이 검은 색이다. 꽃은 9∼10월에 붉은 색으로 피고 잎이 없는 비늘줄기에서 나온 길이 30∼50 cm의 꽃줄기 끝에 산형꽃차례를 이루며 달린다.
총포는 길이 2∼3 cm의 줄 모양 또는 피침 모양이고 막질(膜質:얇은 종이처럼 반투명한 것)이며, 작은꽃자루는 길이가 6∼15 mm이다. 화피 조각은 6개이고 거꾸로 세운 바소 모양이며 뒤로 말리고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주름이 있다. 수술은 6개이며 꽃 밖으로 길게 나온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꽃이 떨어진 다음 짙은 녹색의 잎이 나오는데, 이 잎은 길이가 30∼40 cm이고 다음해 봄에 시든다. 한방에서는 비늘줄기를 약재로 쓰는데, 인후 또는 편도선이 붓거나 림프절염·종기·악창에 효과가 있고, 복막염과 흉막염에 구토제로 사용하며 치루와 자궁 탈수에 물을 넣고 달여서 환부를 닦는다. 또한 비늘줄기는 여러 종류의 알칼로이드 성분을 함유하여 독성이 있지만 이것을 제거하면 좋은 녹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사찰에서 많이 길렀다고 하며, 석산으로부터 얻은 녹말로 풀을 쑤어 탱화를 그리는 데 활용했다고 전한다.
한방에서 약재로 활용한다고 하나, 독성이 있어 모르고 섭취하였을 경우 오심과 설사가 발생하며 심하면 중주신경의 마비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죽음과 관련된 많은 이명(異名)이 존재하는데, 지역에 따라 사인화(死人花), 장례화(葬禮花), 유령화(幽靈花), 지옥화(地獄花) 등으로도 불린다. 일본에서는 주로 피안화(彼岸花)라고 불린다.
○ 특이사항 : 우중 암릉 산행곡에서 시작하는데, 용암산장에서 출발하여 용암사로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 용암산(聳巖山) >
높이 544m이다. 옛이름은 금오산(金鰲山)이다. 산위의 샘에 하늘로 올라간 금자라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정상에서 양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이 날카로워 험해 보이지만 산길은 비교적 순탄하고 위험한 곳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산등성이에 고려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금오산성(전라남도문화재자료 118) 터가 있으며, 산 입구에는 용암사라는 사찰이 있다. 그밖에 영벽정·한천산림욕장·금전저수지·송석정·죽수서원 등 주변에 가볼만한 곳이 많다.
산행은 용암사나 용암산장 뒤편 계곡에서 시작하는데, 용암산장에서 출발하여 용암사로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출처] 용암산 [聳巖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용암산 정상
용암산 산행지도
용암사 도착
용암사
용암사는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용암산(聳巖山)의 기슭에 있는데 1890년 조정기가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폐사가 된 금오사(金鰲寺) 자리에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조선 시대 사료에서는 금오사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사찰 이름을 인근에 폐사된 조선 시대 사찰 용암사(聳巖寺)로 명명한 것으로 보아 1890년에 처음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창건 이후에는 조계종 원로 위원을 지낸 천운(天雲),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암도(岩度) 등이 수행, 정진하였다.
법당은 1978년 3월에 호남 탄좌와 많은 신도들의 시주로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세웠다. 무량수전이 훼멸되자 현 주지 정타(正陀)가 대웅전(大雄殿)과 삼성각(三聖閣)을 짓고 그 서쪽에 종각을 세웠으며, 1981년 음력 1월 그믐날에 100관의 종을 안치하였다.
[출처] 용암사 [聳巖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백일홍
익모초
육모초라고도 한다. 들에서 자란다. 높이 약 1m이다. 가지가 갈라지고 줄기 단면은 둔한 사각형이며 흰 털이 나서 흰빛을 띤 녹색으로 보인다. 잎은 마주나는데, 뿌리에 달린 잎은 달걀 모양 원형이며 둔하게 패어 들어간 흔적이 있고, 줄기에 달린 잎은 3개로 갈라진다. 갈래조각은 깃꼴로서 다시 2∼3개로 갈라지고 톱니가 있다.
꽃은 7∼8월에 연한 붉은 자주색으로 피는데, 길이 6∼7mm이며 마디에 층층으로 달린다. 꽃받침은 5개로 갈라지며 화관은 입술 모양이고 2갈래로 갈라지며 아랫입술은 다시 3개로 갈라진다. 4개의 수술 중 2개가 길다. 열매는 작은 견과로서 넓은 달걀 모양이고 9∼10월에 익으며 꽃받침 속에 들어 있다. 종자는 3개의 능선이 있고 길이 2∼2.5mm이다.
포기 전체를 말려서 산후의 지혈과 복통에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이 풀의 농축액을 익모초고(益母草膏)라고 하는데, 혈압강하·이뇨·진정·진통 작용이 있다고 한다. 한국·일본·중국에 분포한다.
[출처] 익모초 [益母草]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좀작살나무
물봉선
초반오름길
흐린날의 초반 오름길
버섯들의 천국
산성 입구의 수문장
용암산성이 나타남
<금오산성>
금오산성은 한천면 한계리와 춘양면 경계에 걸쳐 있는 높이 544.7m의 용암산 정상부와 중턱에 위치한 둘레 약 1.5㎞의 산성이다. 금오산성은 서남쪽에 위치한 예성산성과 함께 북쪽의 능주를 방어하는 것이 주목적인 성이라고 판단되며, 지형에 따라서는 산성,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는 내륙성, 축조 재료에 따라서는 석정, 평면 형상에 따라서는 폐합부정형성, 중복도에 따라서는 단곽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출처] 산성 [山城]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버섯나무...
안개속의 칠형제봉
맑은날의 칠형제 바위(펌)
더 맑은 날(펌)
바위틈의 닭의장풀
일명 용암바위(?)
금오산성
올여름 더위속에도 살아남은 닭의 장풀
며느리 밥풀
비에젖은 참취
급한대로 인증샷
자전거탄 풍경님
용암산 정상
떠날꺼야님
둥굴레님
이름모를 열매가...
까마귀밥 필이...
물봉선이 핀길을 따라 하산합니다
층층잔대
마타리
산이나 들에서 자란다. 높이 60~150cm 내외이고 뿌리줄기는 굵으며 옆으로 뻗고 원줄기는 곧추 자란다. 윗부분에서 가지가 갈라지고 털이 없으나 밑부분에는 털이 약간 있으며 밑에서 새싹이 갈라져서 번식한다. 잎은 마주나며 깃꼴로 깊게 갈라지고 양면에 복모가 있고 밑부분의 것은 잎자루가 있으나 위로 올라가면서 없어진다.
꽃은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피고 노란색이며 산방꽃차례[揀房花序]를 이룬다. 화관은 노란색으로 지름 4mm이고 5개로 갈라지며 통부가 짧고 수술은 4개, 암술은 1개이다. 씨방은 3실이지만 1개만이 성숙하여 타원형의 열매로 된다. 열매는 길이 3~4mmm로서 약간 편편하고, 배면에 맥이 있으며 뒷면에 능선이 있다.
뿌리에서는 장 썩은 냄새가 난다하여 패장이라는 속명을 가지고 있다. 연한 순을 나물로 이용하고 전초를 소염(消炎) ·어혈(瘀血) 또는 고름 빼는 약으로 사용한다. 뚝갈과와의 사이에 잡종이 생긴다. 일본 열도의 북쪽부터 남으로 타이완 ·중국 및 시베리아 동부까지 분포한다.
높이 801.4m이다. 남쪽에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있으며 와룡마을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이어지는 주능선이 암봉에 둘러싸여 있어 높이에 비해 산세가 웅장해 보인다.
새섬봉과 상사바위·기차바위·민재봉 등의 암봉이 부드러운 능선길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주봉인 민재봉에 오르면 한려수도와 남해의 크고 작은 섬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의 남쪽 와룡골에는 고려 현종의 등극과 관련이 있다는 와룡사와 백천사·백룡사·적선사 등의 사찰터가 남아 있다.
산행코스는 여러 가지이나 보통 와룡마을에서 출발하여 상사바위와 새섬봉를 지나 민재봉에 오른 뒤 용의 꼬리라는 기차바위 능선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많이 선택한다. 산행 시간은 4시간 정도 걸린다.
[출처] 와룡산 [臥龍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와룡산 정상
백천사 위주의 산행코스
와룡골 산행코스
사천 와룡산은 겸남 사천시의 주봉으로 거대한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그 이름이 붙여 졌다고 한다
와룡산 등산로
출발전 안산 즐산 행산을 다짐해 보며
천황봉과 새섬봉은 신불산과 간월산을 보는듯...
편백나무 숲이 산객들을 환영하며 싱그러움을 안겨준다
덕용사에서 소중한 약수를 얻어간다
범부채가 하도 이뻐서 그만
<범부채>
산지와 바닷가에서 자란다. 높이 50∼100cm이다. 뿌리줄기를 옆으로 짧게 벋고 줄기는 곧게 서며 윗부분에서 가지를 낸다. 잎은 어긋나고 칼 모양이며 좌우로 납작하고 2줄로 늘어선다. 빛깔은 녹색 바탕에 약간 흰빛을 띠며 밑동이 줄기를 감싼다. 잎 길이 30∼50cm, 나비 2∼4cm이다.
꽃은 7∼8월에 피는데, 지름 5∼6cm이며 수평으로 퍼지고 노란빛을 띤 빨간색 바탕에 짙은 반점이 있다. 가지 끝이 1∼2회 갈라져서 한 군데에 몇 개의 꽃이 달리며 밑부분에 4∼5개의 포가 있다. 화피갈래조각은 6개이고 타원형이다.
수술은 3개이고 씨방은 하위이다. 암술대는 곧게 서며 3갈래로 갈라진다. 열매는 삭과(蒴果)로서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이고 길이 3cm 정도이며 9∼10월에 익는다. 종자는 공 모양이고 검은빛이며 윤이 난다.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뿌리줄기는 약으로 쓴다. 한국·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출처] 범부채 [Blackberry lily]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까치수염(영)도 끝물인가 봅니다.
거죽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암석들
지나온 기차바위 능선을 돌아봅니다
민재봉(한때 와룡산 최고봉이었는데 정상의 지위를 2010년 새섬봉에 넘겨줌)
너무 이쁜 산행길이 아닐수 없어요
와룡골 너머 삼천포 시내가 보입니다
<배경음악으로 삼천포 아가씨>
♬ 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어린 나를 울려놓고... ♪
새섬봉 정상에서 세상이 물에 잠겼을때 오직 새섬봉에 새한마리 앉을 자리만 남았었다고...
와룡산의 정상은 본래 민재봉(799m)이었으나 재측량결과 국토지리원이 2006년부터 새섬봉을 801.4m로 표기했으며 뒤늦게 안 사천시에서 정상 자리를 새섬봉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커다란 범의 꼬리가 백두산을 온듯 합니다.
<와룡산 전설>
와룡산 지명의 유래와 관련된 또 다른 와룡은 안종(安宗) 욱(郁)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사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 욱은 문장에도 밝았지만 지리에도 정통하여 유배지 사수현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와룡산 지기(地氣)의 영험(靈驗)함에 부합하고자 아들에게 당부하였다. 욱은 일찍이 현종에게 금(金) 한 주머니를 몰래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장사하여라. 그리고 반드시 엎어서 묻도록 하라."라고 유언하였다. 안종 욱 자신이 와룡산의 엎드린 용이 된 것이다. 그는 용두가 아니라 용꼬리에 묻혀서 용으로 승천하였던 것이다.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 안종 욱을 효목대왕으로 추존하였던 것이니 승천하여, 곧 죽어서 임금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 2일 명승으로 승격되었다. 높이는 681m이다.
원래는 신라의 원효(元曉)가 이 산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세웠던 데서 보광산이라 하였는데, 고려 후기 이성계(李成桂)가 이 산에서 100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한 그 영험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 해서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기암괴석들로 뒤덮여 있다. 주봉(主峰)인 망대를 중심으로 왼쪽에 문장봉·대장봉·형사암, 오른쪽에 삼불암·천구암 등의 암봉(巖峰)이 솟아 있다.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비롯하여, 삼사기단(三師祈壇)·쌍룡문(雙龍門)·문장암(文章岩)·사자암(獅子岩)·촉대봉(燭臺峰)·향로봉(香爐峰) 음성굴(音聲窟) 등 금산 38경을 이루는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그리고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와의 절묘한 조화는 명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산 정상에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기도처의 하나이자 쌍계사의 말사(末寺)인 보리암이 있고 그 밑에는 1977년에 해수관음보살상이 바다를 향해 세워졌다.
이동면 복곡 입구에서 금산 8부 능선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인근에 상주해수욕장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출처] 남해 금산 [南海 錦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남해 금산
남해 금산 산행지도
정상부 개념도
안내도
두모주차장 출발전
진시황의 명을 받아 삼신산을 불사약을 찾아 동쪽으로 떠났다는 서복의 동상
<서복(徐福) >
중국 진나라 때의 방사. 자 군방(君房). 《사기(史記)》에는 서불(徐市)로 기술되어 있다.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불로불사(不老不死)하려는 소원을 풀어주기 위하여, 그는 수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영약(靈藥)을 찾아 바다 끝 신산(神山)으로 배를 타고 떠났으나 중국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서복 [徐福]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몇년전 개방했다는 두모탐방로 입구
떨어진 노각나무꽃이 동백꽃처럼 땅위에서 또한번 꽃을 피웁니다
수목속의 오름길
양아리 석각. 흔히 ‘서불(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의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고대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양아리 석각>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동양 최고(最古)의 문자로서 가로 7m, 세로 4m의 평평한 바위 위에 가로 1m, 세로 50㎝ 넓이로 새겨져 있다.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라고도 하는 그림문자로 상주면 양아리에서 금산(錦山) 부소암에 오르는 산중턱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조각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 시황제(始皇帝)의 명령으로 방사(方士)인 서불이 삼신산(三神山) 불로초를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 남해 금산을 찾아와서 한동안 수렵을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새겨 놓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시황제 때는 이미 한문자(漢文字)가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의 고문자(古文字)로 추측되기도 한다.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다.
[출처] 남해 양아리 석각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까치수염도 한창
두모마을과 그 아래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의 저자 김만중이 유배됐던 노도
부소암...진시황의 장남 부소가 유배된 곳이라고는 한데....부소는 위조된 황제의 명으로 북방에 죽었다는데....영 아닌거 같고....
부소암앞 바위동굴...수많은 사연이 있을듯 한데...
장구채도 귀엽게 고개를 내밀고
<장구채>
여루채(女婁菜)·견경여루채(堅梗女婁菜)라고도 한다. 산과 들에서 자란다. 높이 30∼80cm이고 마디는 검은 자주색이 돈다. 잎은 마주나고 긴 타원형 또는 넓은 바소꼴로서 다소 털이 있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7월에 피고 흰색이며 취산꽃차례에 달린다. 꽃받침은 통같이 생기고 끝이 5개로 갈라지며 10개의 자줏빛 맥이 있다. 꽃잎은 5개이고 끝이 2개씩 갈라지며 꽃받침보다 다소 길고 10개의 수술과 3개로 갈라진 1개의 암술대가 있다. 열매는 긴 달걀 모양이며 끝이 6개로 갈라지고 종자는 신장 모양이다.
종자를 최유(催乳)·지혈·진통제로 사용한다. 어린 순을 나물로 한다. 한국, 일본, 시베리아 동부,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전체에 부드러운 털이 있는 것을 털장구채(for. pubescens)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구채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부소암입니다 인간의 뇌모양 같기도...
4경인 부소암은 거대한 둥근 모양의 바위로 사람의 뇌를 꼭 빼닮았다. 부소암에는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서 귀양살이하고 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바다 조망을 배경으로
상사바위. 대개 상사병에 죽는다는 그런사연인데 여기는 상사병에 걸린 총각의 한(?)을 풀어줬다는...
이 바위는 조선조 19대 숙종대왕 시절에 전라남도 돌산지역 사람이 남해에 이거하여 살았는데.
이웃에 사는 아름다운 과부에게 반하여 상사병이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남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아름다운 과부가 이바위에서 남자의 상사를 풀었다 하여 이 바위를 상사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산행의 또다른 꽃 중식시간
흔들바위 거북을 닮아 귀암이라 불렸으나 큰바위가 한사람의 힘으로 흔들린다 하여 요암이라고도 불리운다 한다
부소산장
5년만에 다시 찾은 남해 금산
금산 단체사진
봉수대
보리암. 638년 원효대사가 초당을 짓고 수행하다 관음보살을 친견한 후 초당의 이름을 보광사라 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보리암> 남해군 상주면 금산(錦山) 남쪽 봉우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암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683년(신문왕 3)에 원효(元曉)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금산이라 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액(改額)하였다.
그 뒤 1901년에 낙서(樂西)와 신욱(信昱)이 중수하였고, 1954년에 동파(東波)가 중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주지 양소황(梁素滉)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왼쪽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을 거느리고 있는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씨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출처] 보리암 [菩提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리암
산신각
보리암의 트레이드마크 해수관음상
해골바가지 같은 쌍홍문
쌍홍문은 금산 15경으로 옛날에는 천양문(天兩門)이라 불러왔으나, 신라 중기 원효대사가 두 개의 굴이 쌍무지개 같다고 하여 쌍홍문(雙紅門)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